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른스트 하펠 (문단 편집) === 감독 ===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Ernst_Happel_1965.jpg|width=400]] 1965년 ADO 감독시절의 모습. [[파일:external/www.wien.gv.at/happel4-gr.jpg]] 1970년 유러피언컵 우승 당시의 모습. 1962년에 네덜란드 ADO 덴 하흐의 감독으로 데뷔한 뒤 1968년에 팀을 네덜란드 컵에서 우승시킨 것을 시작으로 실력을 인정받아 1969년에 [[페예노르트 로테르담]]으로 팀을 옮겼다. 하펠도 미헬스처럼 유동적이고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는 토탈풋볼에 대한 이상을 품고 있었다. 이때까지의 미헬스는 포메이션에서 많은 공격 숫자를 유지하는 것을 중요시했지만 페예노르트에 온 하펠은 달랐다. 공간을 더 효율적으로 지배하길 원했다. 그가 원하는 이상적인 축구가 실현된다면 꼭 스타팅 라인업에 공격수의 수가 많지 않더라도 높은 위치에서 여러 명의 선수로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, 더 이상 공격수의 수에 얽매이지 않았다. 그래서 그는 중앙 공격수를 한 명으로 줄이고 미드필더의 수를 늘렸다. 두 명의 미드필더로는 필드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. 그래서 더 안정적으로 경기를 지배하기 위해 미드필더를 세 명으로 늘린 새로운 포메이션을 개발했다. 이것이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쓰이는 4-3-3 포메이션의 탄생이었다. 그 후 4-3-3 포메이션으로 첫 시즌인 1970년 [[UEFA 챔피언스 리그|유러피언컵]]과 [[인터컨티넨탈컵]]에서 우승하며 미헬스가 이끌던 [[AFC 아약스]]보다 먼저 유럽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고 1971년에는 [[에레디비시]]에서 우승하면서 아약스의 트레블을 막으며 명성을 떨쳤다. [[파일:external/clubbrugge.be/50a34f32de6b1.jpg]] 1977년 벨기에 리그 우승 당시의 모습.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Ernst_Happel_1978.jpg|width=350]] 1978년 네덜란드 국대 감독 시절의 모습. 이후 1973년 [[페예노르트 로테르담|페예노르트]]를 떠나 잠시 [[세비야 FC|세비야]][* 이때 [[세비야 FC|세비야]]는 지금과 달리 [[라리가 2|세군다 디비시온]]에 있었다.] 지휘봉을 잡다가, 1974년에 [[클뤼프 브뤼허 KV|클럽 브뤼헤]]로 감독직을 옮겨 벨기에 리그 3연패(1976~78) 달성과 1977년 벨기에컵 우승을 이룬 뒤 1978년에 유러피언컵 결승에 진출했으나 당대 최강팀 [[리버풀 FC]]의 유러피언컵 2연패 달성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으나, 벨기에 축구 역사상 유일한 유러피언컵 결승 진출이라는 대업을 이룬 뒤 [[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]]에서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을 맡아 네덜란드를 결승전을 다시 결승에 진출시켰으나,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다.[* 그런데 재미난점은 8강 2라운드 첫경기서 자신이 선수시절 마지막으로 월드컵에 참가한 오스트리아가 20년만에 월드컵에 진출했고 8강 2라운드 첫경기서 만났는데 자신의 조국을 무려 5-1로 대파했다.][* 그러나 해당 문서에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'''[[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]], [[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]]와 함깨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월드컵'''으로 평가되었다. 당시 주최국을 우승시키기 위해 당국이 유럽강호들을 한조에 묶여 죽음의 조를 만드는 등 만행을 저질렀으며, 승부조작 의혹이 있다.] 그래도 그는 역대 월드컵을 통틀어 월드컵에서 타국의 국가대표팀을 지휘하여 월드컵 결승까지 올라본 단 둘 뿐인 외국인 감독이기도 하다.[* 다른 한 사람은 [[1958 FIFA 월드컵 스웨덴]]에서 스웨덴 대표팀을 이끌어 준우승을 기록한 잉글랜드 출신의 [[조지 레이너]] 감독.] [[파일:external/www.spox.com/ernst-happel-600.jpg]] HSV 감독 시절의 모습. [youtube(f-qCfiH7aO4)] 1990년 방송 인터뷰 영상. [[파일:external/assets.catawiki.nl/bc0de4f0-07e1-0130-5c7c-005056945a4e.jpg]] 생애 말년인 1992년 대표팀 감독시절 모습. 폐암을 앓았던 탓인지 너무 수척해져 있다. 이후 벨기에로 돌아가 팀을 2개나 거치다가 1981년에 독일 함부르크 SV의 감독을 맡아 [[펠릭스 마가트]], [[만프레드 칼츠]] 등을 축으로 1982년과 1983년에 [[분데스리가]]에서 우승한 것을 비롯하여 1983년 [[UEFA 챔피언스 리그|유러피안 컵]] 우승, 1987년 [[DFB-포칼]]을 우승한 뒤에 고국인 오스트리아의 클럽팀 FC 슈와로프스키 티롤(현 [[FC 바커 인스브루크]])을 맡아 1988년과 1989년에 오스트리아 리그 우승과 1989년 오스트리아 컵 우승을 이끌어냈고, 1992년에 오스트리아 대표팀의 수장으로 부임해서 불철주야 활동하다 그해 11월 14일, 폐암으로 별세했다. 평소에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우는 [[골초]]였던 탓에 그의 수명을 단축시킨 것이다. 사후에 그의 업적을 기려 오스트리아의 최대 경기장인 빈 프라터슈타디온 (Praterstadion)을 [[에른스트 하펠 슈타디온]]으로 개칭하였다.[* 최대 53,808 수용가능하며 오스트리아 국가대표 홈구장이다. [[유로 2008]] 결승전이 여기서 진행됐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